요즘은 조금씩 일하는 곳에서 인정을 받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주로 단순한 업무들만을 처리했었다면, 원래 있던 홍보팀장님이 그만둔 이후 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몇 가지 일들에서 나의 능력을 보여주며 최근 두 달새 사무실내에서의 위상이 급상승했다. 다해봐야 겨우 4명이지만 요즘은 처장님도 주로 이런저런 일들을 나한테 믿고 맡기는 편이다. 그리고 소식지나 보도자료, 공문들을 쓰는 것도 거의 나의 일이 되었다.
최근에 처장님한테 요청이 들어온 글이 하나 있었는데, 방송과 콘텐츠 라는 계간지에서 한미FTA와 문화다양성에 관해 쓰면서 방송콘텐츠에 대한 언급도 해달라고 했다.
약 원고지 50장 분량의. 처장님이 그 글을 나한테 한 번 써보라고 했다. 내 스타일의 글은 아니지만,..
1. 무역과 문화다양성
한미FTA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협정을 주도하는 정부는 온 나라를 한미FTA 의 일방적 홍보물들로 뒤덮어놓았고, 반대하는 측들은 협정이 이미 체결되었음에도 강력한 비준저지투쟁을 거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시끌벅적함 속에서 한 가지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 있다. 이미 2년 전에 채택되었던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이다. 체결 당시 미국과 이스라엘만이 반대한채 사실상의 만장일치로 채택됨으로써 문화분야에서 미국을 왕따시켰다는 이야기들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2년이 지난 지금 한국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이 협약에 관한 이야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 협약이 스크린쿼터를 축소시키고, 각종 쿼터 제한들을 완화, 폐지하며, 문화적 제한조치들을 철회하고자 하는 한미FTA와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미 62개국에서 유네스코에 협약에 대한 비준기탁을 완료하였고, 2007년 3월 18일에는 국제법으로 발효된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에 대해 한국정부는 협약에 찬성표를 던진 이후, 만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외교통상부가 빨리 검토과정을 마치고 국회에 넘겨서 국회비준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나 참 이상한 일이다. ‘세계문화기구를 위한 연대회의’가 주최한 2007년 3월의 협약발효 기념 토론회에서 외교통상부 문화산업국 국장의 “우리도 협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나, 협약에 대해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며, 가능한 빨리 검토를 마치고 국회로 넘기겠다”는 매우 관료적인 말 한 마디만이 있었을 뿐이다. 전 분야에 걸쳐 개방을 약속해 한국사회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그리고 절반의 국민들은 여전히 반대하고 있는 한미FTA에 대해서는 협정이 체결 되자마자 곧바로 연내 비준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2년이 되어가도록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에 관한 한국정부의 태도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미FTA 협상과정에서도 한미FTA가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에 위배되는가 하는 문제는 정부의 고려사항에도 전혀 들어있지 않은 듯했다. 두 가지 국제 조약을 추진하는 정부가 두 협상의 조화 여부를 검토하는 것은 협상에 임하는 정부의 상식적인 태도에 속하는 것이다. 오로지 반대하는 몇몇 단체들만이 나서서 문화다양성 협약에 위배되는 한미FTA를 중단하라는 기자회견을 하고, 협약발효를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있으나 한국정부는 여전히 침묵중이다.
문화와 무역을 둘러싼 갈등이 한국사회에선 한국정부의 일방적 침묵으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으나 국제사회에서 그 양상은 현저히 다르게 진행되어 왔다. 교통수단과 통신기술의 급격한 발달속에 각 국의 교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던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문화적 정체성과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매우 강력하게 그리고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920년대에,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프랑스,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영국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은 미국영화의 갑작스런 유입으로 자국 영화산업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고, 이에 자국의 영화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스크린쿼터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자 미국정부는 미국영화업자들로 구성된 미국영화수출연합과의 긴밀한 협조속에 1946년 프랑스와 전쟁채무의 일부를 삭감하는 조건으로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블룸-번즈(Blum-Byrnes)협정을 맺었고, 그 외에도 각국 정부와 직접적인 협상을 통해서 스크린쿼터 축소 및 폐지에 매달려왔다. 그러나, 1947년 GATT(무역과 관세에 관한 일반협정)가 발효되었고, 제4조를 통해 문화상품의 특수성을 인식하여 적어도 영화의 경우에는 스크린쿼터를 인정하자 스크린쿼터에 대한 갈등은 잠시 중단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크린쿼터에 대한 예외 인정은 이후 방송분야에 대한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GATT 4조의 예외조항을 비디오로 녹화하여 TV에서 상영하는 영화 및 TV프로그램까지 확장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이 조항이 영화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국가들은 GATT 4조가 TV프로그램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조항이 만들어지던 1947년 당시 이러한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TV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제4조를 적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1960년대에 시작된 이러한 갈등은 1980년대 말, 유럽공동체가 지침 제4조 “국경없는 TV령”(유럽공동체 회원국은 실행가능하고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여, 방송사에서 전송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유럽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한정해야 한다)을 마련하자 정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에 대한 갈등은 결론을 짓지 못하고 우루과이 라운드의 서비스 협상으로 미루어졌다.
GATT 4조에 대한 논쟁은 이후 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협상과 OECD가입국들이 체결을 시도했던 다자간투자협정(MAI)을 통해 ‘문화적 예외’의 인정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된다. 문화적 예외는 국제통상협정에서 문화를 협상의제로 삼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미국과 몇몇 국가를 제외한 국제사회가 국제무역의 규범으로 지켜온 것이었다.
이에 미국은 문화다양성을 지키려는 여러 나라들의 반대로 WTO나 DDA(도하개발의제)같은 다자간 협상에서는 다른 나라들의 문화시장 개방을 관철시키기 어려워지자 현재는 FTA(자유무역협정)같은 양자간 협정을 통해 상대국의 문화시장 개방을 각개격파 식으로 시도하고 있다. 한미FTA를 통한 한국의 스크린쿼터나 방송시장 개방문제 등도 이런 맥락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2.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
이처럼 국제사회는 문화를 무역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문화를 지키는 것은 일반 상품처럼 단순히 한가지의 산업영역을 지키는 것이 아닌 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양한 무역기구나 협정을 통해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무역과는 달리 문화는 GATT 4조, WTO, DDA같은 무역기구나 무역협정의 틀내에서 각국의 의지에 기대거나 여러 국가들이 선언이나 결의 등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상품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전지구적인 세계화 속에서 자유무역의 요구들이 더욱 거세지자 더 이상 낮은 수준의 선언이나 결의, 의지만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법적인 구속력을 갖추고, 전세계를 아우르는 강력한 국제기구나 협약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유네스코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the Diversity of Cultural Expressions)(이하 문화다양성협약)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내기 위한 인류사회의 힘겨운 투쟁의 성과물인 것이다. 유럽연합이 2006년 12월 18일 파리에서 문화다양성협약 비준서를 기탁하며,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문화다양성협약이란 문화다양성을 증진하고 보호하는 공공 정책의 역할과 정통성을 인식하고, 국가간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문화적으로 취약한 국가,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국제 협력을 증진하고, 협약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다른 국제 제도와 어떻게 적절한 연관성을 갖추어야할 지를 천명하는 등 많은 역할과 공헌을 하고 있다. 또한 협약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보다 넓은 틀 안에서 문화를 다룰 수 있도록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였다.”라고 설명하며 협약의 구체적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다양성협약의 구체적 내용들을 살펴보면,
제6조 국가적 차원의 당사국 권리
1. 각 당사국은 제4조 6항에서 정의된 문화 정책과 조치의 틀 내에서 자국의 특수한 상황과 필요성을 고려해, 그 영토 내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조치를 채택할 수 있다.
2. 그러한 조치는 다음 사항을 포함한다.
a)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규제조치
b)문화 활동, 상품 및 서비스에 이용되는 언어에 관한 규정을 포함하여, 당사국 영토 내의 모든 문화 활동, 상품 및 서비스 가운데 자국의 것이 창조, 생산, 보급, 유통, 향유될 수 있는 기회를 적절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조치
.......
h)공영 방송 이용을 포함하여 미디어의 다양한 증진을 위한 조치
이처럼 제 6조의 경우 각 당사국의 문화정책 수립, 집행의 자주권을 보장함으로서 기존의 무역과 문화의 갈등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문제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명쾌하고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조항이 다른 협정, 협약 또는 국제법과 충돌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문화다양성협약에서는 다른 협약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규정해 놓고 있는데,
제20조-다른 협약과의 관계 상호 지원성, 보완성, 비종속성
1. 당사국은 이 협약과, 자국이 당사국으로 되어 있는 모든 기타 조약하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 협약을 기타 어떤 조약에도 종속시키지 않으면서,
(a)이 협약과, 자국이 당사국인 다른 조약간의 상호 지원성을 증진해야 하고,
(b)자국이 당사국인 다른 조약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혹은 다른 국제적 의무에 따를 때 이 협약의 관련 조항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이 제20조에서는 문화다양성협약이 기타 어떤 조약에도 종속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화다양성협약은 WTO체제나 다른 협약에서 합의한 내용을 바꾸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WTO나 다른 협약에서는 무역협상에서 문화에 대한 문제를 충분히 다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비어 있는 부분을 문화다양성협약이 메우고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국제무역의 협상과 실행 과정에서 문화다양성의 목적과 원칙을 고려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문화다양성협약은 다른 조약과 상호 충돌이 아닌 오히려 위의 (a)항에서처럼 상호 지원,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협약이 법적인 측면에서 완전하게 협약의 정신들을 보장하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들은 협약 이후 당사국들의 노력을 통해 보완해나가야 할 것이고, 협약 또한 그러한 노력의 구체적 부분들을 명시해놓고 있다. 따라서 협약이 이미 발효되어 비준기탁이 완료된 62개국에서는 국내법으로 적용을 받겠지만, 이런 의미에서 문화다양성협약은 여전히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다. 협약의 완성은 각 당사국들이 협약의 원칙들에 대해 국내적, 국제적인 차원에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는 의지들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협약은 이후의 구체적인 협약 이행계획에 대해서도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선 협약이 발효하게 되면, 당사국 회의를 통해 24명의 정부간 위원을 선출할 것이고, 정부간 위원회는 협약의 이행을 촉진 및 증진시키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특히 첫 정부간 위원회에서는 문화다양성협약의 목적 및 원칙을 장려하기 위한 절차 및 기타 자문 메커니즘을 설립(제23조 6항 (e))하는 등의 향후 몇 년간의 행동계획들을 개발할 것이다. 한편 협약 기구와 당사국 정부는 협약 이행을 감시할 의무를 가지는데, 특히 협약은 시민사회에 의한 협약 이행의 감시(제11조)도 보장하고 있다. 한편 구체적인 행동계획들을 통해 특별 분쟁해결 기구로 문화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중재 위원회(Conciliation Commitee)를 구성한다면 분쟁 해결에 대한 비교역적인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으며 문화적 고려에 기반한 법 체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이 협약이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자발적으로 채택한 협약으로서, 그 강력한 지지와 인류사회의 대합의만으로 충분히 강력한 명분과 당위성, 강제성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3. 한미FTA와 문화다양성
지난 27일 국회에서 열렸던 한미FTA 문화분야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김종훈 수석대표는 의원들의 질의에서 문화분야에서는 우리 정부가 양보한 것이 많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물론 대신 다른 분야에서 협정의 균형을 맞추었다고 주장했지만, 문화가 과연 양보할 만한 것인가? 우리가 자동차 분야에서 몇 백억의 이익을 얻게 될테니 문화분야에서 몇 백억의 손해를 봐도 된다는 식의 협상태도가 과연 적절한 것인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영화가 가는 곳에 미국 상품이 팔린다”고 하며 하며 1930년대 이미 문화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으나, 21세기 한국의 협상단은 여전히 문화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한미FTA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축소되었던 스크린쿼터는 한미FTA 이후 문화분야에서 한국의 암울한 미래와 그로부터 파생될 엄청난 파급효과들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한국 정부는 한미FTA협상을 시작하기 전인 2006년 1월 스크린쿼터제의 축소를 기습적으로 발표했고, 146일에서 73일로 축소된 스크린쿼터는 작년 7월1일부터 시행되었다. 정확히 1년이 지난 현재 한국영화의 현 주소는 어떠한가? 10년째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던 한국영화의 점유율은 처음으로 하락했고 대신 미국영화들이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한국영화의 제작편수는 지난해 108편에서 올해는 절반수준으로 하락할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스크린쿼터 축소의 효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스크린 독점, 교차/부분상영 등의 편법상영, 소규모 영화자본의 몰락, 극장 입장료 인상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한류 등을 통해 한국의 대외신인도 향상에 큰 역할을 해왔던 한국영화의 몰락은 단순히 영화산업의 몰락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축소된 스크린쿼터 73일을 한국영화의 위기시에도 스크린쿼터를 다시 회복할 수 없도록 하는 현행유보조항에 포함시킴으로서 한국영화가 회생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마저 닫아버렸다. 축소 시행 1년만에 나타난 이러한 한국영화의 심각한 위기는 한미FTA이후 방송이나 지적 재산권 등 문화분야에서 겪게 될 암울한 미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한국 정부는 스크린쿼터뿐만 아니라 국내 문화 환경의 최소한의 보호를 위해 기능하는 비관세 조항 대부분을 해제하였고, 저작권∙미디어를 포함하여 문화 분야의 대대적인 개방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공공성을 유지해야 할 방송분야에서는 유료방송시장에서 간접투자를 100% 허용함으로써, 유료방송시장의 상업화와 방송콘텐츠의 다양성 훼손은 물론 지상파 방송의 공공성마저 저해할 위험성을 지닌다.
특히 공정한 경쟁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유통시킨다는 명분으로 각종 쿼터제가 축소, 완화된 것에서 미국은 그의 의도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다. 쿼터제 완화상황을 보면, 우선 영화에서 스크린쿼터가 146일에서 73일로 완화되어 현행유보 조항으로 포함되었으며, 방송 부문에서 종합유선방송사업자, 위성방송사업자, 또는 방송채널사용업자에 채널별로 적용되는 연간 분야별 쿼터의 경우 애니메이션의 경우 30%(30%이상 한국 콘텐츠로 편성)로 확정되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방송위원회가 고시하던 35%에서 30%로 5%가 떨어진 것이다. 외형적으로 5%만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조항의 경우 기본 방송법 시행령에서는 애니메이션 쿼터를 30%-50%로 규정해왔기 때문에 때에 따라 50%까지 상향조정될 수 있었던 게 최저 고시율로 확정된 것이다. 이러한 쿼터 완화조치들은 영화, 음악 뿐 아니라 지상파 방송의 각 영역에서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하지만 미국은 이 뿐만 아니라 60%였던 1개 국가 콘텐츠 한도를 80%이상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었는데, 이 조항은 한국의 방송시장에서 다양한 콘텐츠 유통이 아닌 미국 콘텐츠들이 방송시장을 독점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미국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조항이다. 미국의 명분대로 쿼터가 완화되어 한국 콘텐츠가 없어진 자리를 다른 나라의 다양한 콘텐츠들이 차지한다면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 충분히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콘텐츠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될 것이다. 이는 이미 스크린쿼터 축소로 1년 먼저 FTA효과를 겪은 한국영화산업의 현황이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영화 점유율은 지난해 61.6%에서 47.4%로 14.2%떨어진데 반해 미국영화 점유율은 26.4%에서 44.7로 18.3%나 상승함으로서 한국영화가 떨어진 것보다 그 이상을 미국영화들이 채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화에서의 이러한 현상들은 방송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만큼이나 안정된 시스템과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미국 방송콘텐츠들이 곧 한국의 방송시장을 점령하게 될 것이다.
즉, 한국의 문화는 시간이 갈수록 다양성이 아닌 미국자본에 의한 획일화된 형태가 될 것이고, 더불어 한국의 문화산업이 축소되면서, 국내적 다양성까지 무너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런 문화분야의 붕괴가 한국사회에 미칠 파급효과들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4.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과 한미FTA
앞에서 한미FTA협상을 통한 문화분야에서의 불리한 협상이 한국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가져오게 될지 살펴봤다. 구체적인 피해규모나 자료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피해규모는 엄청날 것이며, 또한 그 피해가 다른 산업분야와 한국사회 전반에 미치게 될 파급효과는 구체적 수치나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수준 훨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스크린쿼터의 경우에도 3-5년 후에나 그 영향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수준으로 그 피해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이제 추가협상과 6월 30일엔 협정에 체결하는 서명까지 끝나, 한미FTA는 국회에서 비준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만이 남게 되었다. 암울한 상상들이 점차 현실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문화계가 위기에 봉착해 있는데 반해, 국제사회는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의 장밋빛 희망에 부풀어있다. 협약의 과정들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62개국이 유네스코에서 비준기탁을 완료했는데, 다른 협약과 달리 각 국의 비준과정이 이례적으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10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1차 당사국회의를 6월로 앞당겨 실시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협약의 구체적인 실행계획들도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협약은 예상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국제 사회에서 힘과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국제 문화시민단체들도 문화다양성협약의 참여감시자로 공식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이미 조직을 CCD(문화다양성연대)에서 IFCCD(국제문화다양성연맹)로 확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이런 흐름에 한국정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한미FTA협상을 통해 각종 문화분야의 대대적 개방을 약속했으며, 국내 문화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 장치들을 철회했다. 특히 정부가 공정한 시장질서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 투자자 국가제소권, 비위반제소 등을 통해 미국이 문제제기를 할 여지를 만들어줌으로서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에서 보장해준 당사국 권한마저 스스로 포기해버렸다. 이런 한국을 이제는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문화다양성협약이 발효되기 전날인 3월 17일에는 국제문화전문가단체 국제운영위원회(ILC-CCD)에서 한국정부의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의 국회비준을 촉구하고 한미FTA협상을 규탄하는 특별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도 국제사회의 이런 시선들을 외면한채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의 비준을 언제까지나 늦출 수는 없을 것이다. 한미FTA와의 충돌 때문에 한국정부가 지금껏 외면해왔지만 한미FTA가 이미 체결되었기에 문화다양성협약 또한 곧 비준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점점 선택의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한미FTA와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 이 모두가 비준될 경우 분명 국내적으로, 그리고 국제사회에서도 많은 논란이 될 것이며, 여기에서는 한국 정부의 의지와 선택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에 따라 곧 생기게 될 문화다양성협약의 분쟁조정위원회에 의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는 GATS의 서비스 분과협상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하고 증진하고자 하는 국가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특별히 고안된 새로운 국제기구가 설립될 때까지는, 문화정책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어떤 서약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개별 공동체 구성원의 삶의 가치, 생활 방식, 정서 등이 종합적으로 함축된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생산되는 문화상품은 사회구성원의 생활양식과 정체성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한국 정부의 올바른 선택과 문화에 대한 의지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한국의 문화계와 시민사회 등이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 한국정부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