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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活의 發見

그냥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을 뿐.

#1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에서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지만.
나는 역사의 종말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구체적인 종말을
중학교 수학시간에 확률이란 걸 처음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확률의 법칙은 세상의 많은 것은 필연적인 종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둑판은 총 381(19*19)개의 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바둑판에 돌을 놓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는

381*380*379*378*377*....*1이다.
만약 이 경우의 수만큼 대국이 두어진다면
바둑의 세계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피아노의 건반 수는 일반적으로 88개이다.
그렇다면 멜로디의 경우의 수는 88*88*88*......*88이다.
대략 12개의 음표가 2마디를 구성한다고 할 때
88의 12제곱수 만큼을 하게 되면 약2마디의 멜로디가 결정된다.
물론 박자도 다르고 쉽표도 있고 하겠지만,
박자를 바꾸고 쉽표를 넣는다고 하여
그 멜로디에서 음악의 느낌이 크게 바뀌기는 힘들 것이다.
게다가 완전 엉망인 음악이 탄생할 가능성이 훨씬 많기에
그 가능성은 배제한다면.
어쨌든 그렇게 되면 음악의 세계도 종말을 맞는 것이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정해져있다.
더 많은 인류가 사용하는 영어의 알파벳도 정해져있다.
문자의 조합을 하는 경우의 수는 존재하게 될 것이며
한 문단의 경우의 수가 끝난다면
문학도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근대 문학의 종말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말로 구체적인 실제의 종말을 말이다.

물론, 계산되는 경우의 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정도의 매우 큰 숫자이며,
바둑이 끝나거나, 피아노가 끝나거나, 문학이 끝나기 전에
지구가 환경오염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어버릴지도 모르고,
서로의 욕심으로 인류가 멸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종말은 있다는 것이다.
바둑에도,
우리가 오묘한 예술이라고 평가하는 음악이나 문학에도 말이다.

#2
오묘한 음악이나 문학같은 예술은 그 끝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세상의 많은 것들은 무한한 확률의 법칙 속에서 움직인다.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공이나 귤같은 거)를 바로 위 공중으로 살짝 던지게 되면,
그 공이 그리게 될 궤적의 경우의 수는 무한정이다.
그 공이 움직이는 공간은 제한적이지만
제한적인 공간은 딱 떨어지는 수가 아니라
무한정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1/10, 1/100,1/1000,1/10000,1/100000.... 등등으로 말이다.

그 무한한 확률 속에서도
내 손은 너무나 당연하고 쉽게
무리한 위치나 동작만 아니라면
그 공을 아무렇지 않게, 매우 쉽게 잡아낼 수 있다.
어쩌면 수많은 근육들이 지금껏 해온 습관처럼
내 손이 움직여 공을 잡아낸다.

이것은 이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내 신체들이 움직일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생각해보라..
무언가가  이런 각도로 올라가서 이런 각도로
떨어질 것 같으니 이 위치에 손을 가져가야
그 공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 그런 복잡한 계산들을 하기 전에
그 공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있을 것이다.
습관에서 나오는 일인 것이다.
숟가락으로 떠서 밥을 입에 넣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3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고 나면,
술자리의 옆에 있던 친한 사람이,
혹은 집에 돌아가서의 동생이 낯설어보이곤 한다.

꼭, 술을 마시진 않더라도
가끔은,
세상의 많은 것들이 낯설어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매일 밥을 먹는 숫가락이 낯설어보이기도 하고,
매일 입고 다니는 옷이나, 신발이,
혹은 살고 있는 동네가 낯설어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습관처럼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떨어지는 공을 잡기 위해 내 손이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숟가락을 떠서 입의 정확한 위치에 밥을 넣고,
길을 머리에 떠올리지 않고도 집을 쉽게 찾아가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지고 습관처럼 굳어져 당연하게 여기는 이러한 것이
때때로 다시 쳐다보거나, 다른 생각들을 하다보면,
다르게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

확률의 법칙에 의해
예술이나, 음악이나, 문학은 제한적임에도
우리의 삶은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고,
그 무한한 경우의 수 속에서 어떤 행동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습관처럼 매일 하던 행동만을 택하고,
제한된 사유적 습관속에서 제한된 사유만을 하며
제한된 사유 속에서 생각하고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고집은 낯선 것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회의했고,
그 속에서 얻어낸 유일한 결론이
"인간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을 것이다.

당장, 나는 1분 후의 행동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일부분을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앞뒤의 연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워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냥 컴퓨터를 꺼버릴 수도 있을 것이며,
계속해서 글을 쓰며
자연스럽게 저장하기 버튼을 누를 수도 있을 것이고,
회사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밖으로 나가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연관성은 없지만,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수도 있을 것이며
그냥 누워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진 인과관계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도,
편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중의 하나겠지만,
때로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며
일상적인 모든 것들을 낯설게 보고
전혀 낯선 행동을 꾸며보는 것 또한
인생을 즐겁고, 재미있게, 그리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세상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없다.
그냥 우리가 그렇게 살아온 것 뿐이다.